고우다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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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우다 천황은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 천황으로, 1274년부터 1287년까지 재위했다. 가메야마 천황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치세 동안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의 침입(원구)을 겪었으며, 1287년 후시미 천황에게 양위했다. 이후 법황으로서 인세를 행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고, 아들 고니조 천황과 고다이고 천황의 치세에 걸쳐 원정을 펼쳤다. 진언밀교에 깊이 귀의하여 종교 활동을 했으며, 1324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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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다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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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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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요히토 (世仁) |
묘호 | 고우다 (後宇多) |
별칭 | 다이가쿠지 도노 (大覚寺殿) 곤고쇼 (金剛性) |
출생일 | 1267년 12월 17일 |
출생지 | 헤이안쿄 쓰치미카도도노 (土御門殿) |
사망일 | 1324년 7월 16일 |
사망지 | 헤이안쿄 다이가쿠지 (大覚寺) |
능묘 | 렌게부지 능 (蓮華峯寺陵) |
장례일 | 1324년 7월 19일 |
재위 기간 | 1274년 3월 6일 – 1287년 11월 27일 |
일본식 재위 기간 | 분에이 11년 1월 26일 - 고안 10년 10월 21일 |
즉위례 | 1274년 5월 4일 |
대장제 | 1274년 12월 18일 |
시대 | 가마쿠라 시대 |
연호 | 분에이 겐지 고안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가메야마 천황 |
어머니 | 후지와라노 기쓰시 |
배우자 | 호리카와 모토코 (1285–1307) |
자녀 | 고니조 천황 쇼시 내친왕 고다이고 천황 그 외 |
정치 | |
정치 체제 | 일본 천황 |
섭정 | 고레야스 친왕 |
상황 | 가메야마 상황 (1274년-1287년) |
집권 | 호조 도키무네 (1268년-1284년) 호조 사다토키 (1284년-1301년) |
정이대장군 | 고레야스 친왕 (1266년-1289년) |
관백 | 다카쓰카사 가네히라 (1278년–1287년) 니조 모로타다 (1287년–1289년) |
섭정 | 구조 다다이에 (1274년) 이치조 이에쓰네 (1274년–1275년) 다카쓰카사 가네히라 (1275년–1278년) |
태정대신 | 가잔인 미치마사 (1275년-1276년) 다카쓰카사 가네히라 (1277년) 다카쓰카사 모토타다 (1285년-1287년)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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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267년(문영 4년) 가메야마 천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도인 사네오의 딸 도인 키시(교고쿠인)이다. 1268년(문영 5년) 생후 8개월 만에 고사 천황의 뜻에 따라 황태자가 되었다.[3] 1274년(문영 11년) 가메야마 천황의 양위를 받아 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4] 가메야마 상황이 원정을 행하였다.
고우다 천황의 치세 중에는 원·고려 연합군에 의한 문영·홍안의 역(원구)이 발생했다. 몽골군은 규슈(Kyushu) 하카타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려 했으나, 호조 도키무네의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4][5]
1275년(겐지 원년), 고후카쿠사 상황은 자신의 계통(지묘인 왕통)이 아닌 가메야마 상황의 계통(다이카쿠지 왕통)이 천황을 계승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막부에 압력을 가했다. 막부의 중재로 고후카쿠사 상황의 황자인 히로히토 친왕(후시미 천황)이 황태자가 되었다.[5] 1287년(고안 10년), 막부의 요청에 따라 고우다 천황은 히로히토 친왕에게 양위하였다. 이후 지묘인 왕통과 다이카쿠지 왕통 간의 황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었고, 막부는 양통질립 원칙을 제시하며 중재에 나섰다.
고우다 천황은 양위 후에도 상황으로서 원정을 행하며 실권을 유지했다. 1301년(쇼안 3년)부터 1308년(도쿠지 3년)까지 아들 고니조 천황의 치세 동안 원정을 펼쳤다.[6] 1307년(도쿠지 2년) 총애하던 후궁 유기몬인이 사망하자 닌나지에서 출가(득도)하여 법황이 되었다.
1318년(분포 2년) 둘째 아들 고다이고 천황이 즉위하자 다시 원정을 시작했으나, 1321년(겐코 원년) 원정을 중지하고 은거했다.[6] 이후 고다이고의 친정이 시작된다. 고우다 천황과 고다이고 천황은 정치적으로 대립하지 않았고, 오히려 서로 신뢰하는 관계였다는 주장도 있다.
고우다 천황은 진언밀교에 깊이 귀의하여, 쇼와 2년(1313년)에는 고야산 참배를 갔다. 진언밀교 관련 저서로는 『홍법대사전』, 『후우다 천황 신한어수인유고』 등이 있다.[9] 다이가쿠지에서 원정을 집행할 때 법인·법안·법교 등의 칭호·위계를 설치하고, 이 칭호의 수여에 관한 권한을 다이가쿠지에 부여하는 영선지를 내렸다. 도지에도 적극적으로 지원을 했다.
겐코 4년(1324년) 6월 25일, 다이카쿠지 궁에서 58세로 붕어했다.[6] 교토시 우쿄구 기타사가 아사하라야마초에 있는 렌게부지노 미사사기(연화봉사릉)에 능이 있다.[7] --
2. 1. 출생과 즉위
1267년(문영 4년) 가메야마 천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도인 사네오의 딸 도인 키시(교고쿠인)이다. 1268년(문영 5년) 생후 8개월 만에 고사 천황의 뜻에 따라 황태자가 되었다.[3] 1274년(문영 11년) 가메야마 천황의 양위를 받아 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4] 가메야마 상황이 원정을 행하였다.고우다 천황의 치세 중에는 원·고려 연합군에 의한 문영·홍안의 역(이른바 원구)이 발생했다.
2. 2. 몽골의 침입 (원구)
고우다 천황의 재위 기간 동안 몽골의 침입(원구)이 두 차례 있었다. 1274년(분에이 11년) 1차 침입(분*에이*의 역)과 1281년(고안 4년) 2차 침입(고*안*의 역)이 그것이다. 몽골군은 규슈(Kyushu) 하카타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려 했으나, 호조 도키무네의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4][5] 이 두 차례의 침입은 가마쿠라 막부 무사들의 분전과 태풍(신풍)으로 인해 모두 실패로 끝났다.2. 3. 황위 계승 분쟁과 양위
1275년(겐지 원년), 고후카쿠사 상황은 자신의 계통(지묘인 왕통)이 아닌 가메야마 상황의 계통(다이카쿠지 왕통)이 천황을 계승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막부에 압력을 가했다. 막부의 중재로 고후카쿠사 상황의 황자인 히로히토 친왕(후시미 천황)이 황태자가 되었다.[5] 1287년(고안 10년), 막부의 요청에 따라 고우다 천황은 히로히토 친왕에게 양위하였다. 이후 지묘인 왕통과 다이카쿠지 왕통 간의 황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었고, 막부는 양통질립 원칙을 제시하며 중재에 나섰다.2. 4. 원정
고우다 천황은 양위 후에도 상황으로서 원정을 행하며 실권을 유지했다. 1301년(쇼안 3년)부터 1308년(도쿠지 3년)까지 아들 고니조 천황의 치세 동안 원정을 펼쳤다.[6] 1307년(도쿠지 2년) 총애하던 후궁 유기몬인이 사망하자 닌나지에서 출가(득도)하여 법황이 되었다.1318년(분포 2년) 둘째 아들 고다이고 천황이 즉위하자 다시 원정을 시작했으나, 1321년(겐코 원년) 원정을 중지하고 은거했다.[6] 이후 고다이고의 친정이 시작된다.
고다이고에게 정무를 이양한 이유는 『증경』 "가을의 미야마"에 의하면 불도 수행에 전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모리 시게아키는 고다이고를 조정의 이단아로 보고, 고우다는 말년에 고니조 천황의 장남(자신의 적손)인 황태자쿠니요시 친왕의 즉위를 통해 다이가쿠지 측이 조기에 일원화되는 것을 바랐다고 하며, 중계에 만족하지 않는 고다이고 천황과의 부자 관계는 차츰 소원해졌고, 그 결과 고다이고 측의 압력에 의해 원정 중지 및 천황 친정에 이르렀다고 추측했다.
한편 카와치 쇼스케는 고다이고의 정책이나 행동에 특이한 점은 없고, 정책적으로 두 사람이 대립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고다이고로부터 고우다에 대한 존경은 매우 컸다고 여겨지고, 고우다로부터 고다이고에게도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신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하며, 고우다가 불도에 전념하고 싶다는 것은 본인이 진의를 숨기기 위해 공언한 것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고다이고에게 실적과 권위를 쌓게 함으로써 정적의 쿠니요시파와 준직계의 고다이고파의 이두 체제로 천황위·황태자위를 독점시켜 지묘인 측 친왕의 황태자 책봉을 막고, 양통철립에서의 완전한 승리를 배후에서 책략한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다.
나카이 유코는 산죠 사네무네의 『사네무네경기』 도쿠지 2년 1월 7일조(백마절회에서의 부자 교류)나 7월 24일조(고우다의 총애를 받던 후궁 유기몬인의 회유 기원을 위해 스네하루(고다이고)가 분주했던 일) 등을 인용하여,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고우다와 고다이고는 심정적으로도 서로 사이좋은 부자였던 것은 아닐까 하고 카와치설을 보강하는 추측을 했다. 덧붙여 『증경』의 불도 전념설이 역시 옳을 것이라고 하고, 고니조 시대에도 정무를 양보하려고 했던 흔적이 있는 것[9], 이미 이전부터 고다이고에게 소령 관리를 맡기고 있었던 것 등을 들어, 후계자 육성이 일단락된 곳에서 정무를 떠나 은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다.
2. 5. 불교 신앙
고우다 천황은 진언밀교에 깊이 귀의하여, 쇼와 2년(1313년)에는 오랫동안 소망했던 고야산 참배를 갔다. 참배 도중 산중에서 격렬한 뇌우를 만나 기절할 정도로 지쳐 버렸지만, 고야산에 도착할 때까지 거가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진언밀교 관련 저서로는 『홍법대사전』, 『후우다 천황 신한어수인유고』 등이 있다.[9] 다이가쿠지에서 원정을 집행할 때 법인·법안·법교 등의 칭호·위계를 설치하고, 이 칭호의 수여에 관한 권한을 다이가쿠지에 부여하는 영선지(영대에 걸쳐 유효한 선지)를 내렸다(단, 이 영선지는 메이지 유신을 맞이하면서 폐지되었다). 또한, 닌나지의 오무로 문적이 호쇼 호신왕 사후, 칸쇼 호신왕이 후임으로 결정될 때까지 별당을 대행하고 있던 젠조(츄인 츠우나리의 아들)에게 문적만이 알 수 있는 비의 "밀요초" 내용 전수를 요구하여 호쇼에게 저지당하기도 했다.도지에도 적극적으로 지원을 했는데, 토쿠지 3년(1308년) 고니조 천황의 칙명 형태로 도지 및 히로사와류와 인연이 깊은 에키신에게 "본각대사" 시호를 수여했다. 이에 엔랴쿠지가 반발하여 진언종과 천태종의 다툼으로 번졌고, 지묘인 측이나 가마쿠라 막부까지 끌어들이는 정치 문제로 확대되었다.[9] 키타바타케 친부는 『신황정통기』에서 고다이고 천황이 아버지 고우다 법황의 신앙을 계승하면서도 진언종뿐 아니라 다른 종파에도 배려했다고 칭찬하며, 고우다인의 진언종 중심 종교 정책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9]
2. 6. 죽음
겐코 4년(1324년) 6월 25일, 다이카쿠지 궁에서 58세로 붕어했다.[6] 교토시 우쿄구 기타사가 아사하라야마초에 있는 렌게부지노 미사사기(연화봉사릉)에 능이 있다.[7] -- 궁내청 상의 형식은 방형당·석조오륜탑이다. 다이고쿠지 덴에서 붕어하고, 3일 후에 연화봉사의 곁산에 장례되었다고 한다. 황거 황령전(궁중삼전 중 하나)에는 다른 역대 천황·황족들과 함께 천황의 령이 봉안되어 있다.3. 인물 및 평가
고우다 천황은 천성이 총명하고 경사(經史)를 널리 읽었으며, 시와 글짓기에 능하고 예서(隷書)에도 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9] 정적이었던 하나조노 천황은 『하나조노 천황 신기』에서 고우다 천황을 "말년의 덕이 부족했지만, 말대(末代)의 영주(英主)임에는 틀림없다"라고 평했다.[9] 모리 시게아키는 고우다 천황을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를 견인한 인물 중 한 명이며, 역대 천황・상황 중에서도 드물게 볼 수 있는 뛰어난 정치가"라고 평가했다.[9]
4. 가계도
고우다 천황의 이름은 世仁일본어였다.[2]
가메야마 천황의 차남으로, 다이카쿠지 계통이었다.
고우다 천황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배우자 | 이름 및 생몰년 | 출신 가문 및 비고 | 자녀 |
---|---|---|---|
중궁 | 세이카몬인 호리카와(미나모토) 모토코(키시) (1269-1355) | 호리카와 소나모리의 딸, 쿠가 모토소나의 양녀 | 제1황자: 구니하루 친왕 (고니조 천황) |
텐시 | 단텐몬인 이츠츠지(후지와라) 다다코(츄시) (1268-1319) | 이쓰쓰지 다다쓰구의 딸, 카잔인 모로츠구의 양녀 | |
비(妃) | 유기몬인 레이시(레이코) 내친왕 (1270-1307) | 고후카쿠사 천황의 황녀 | 없음 |
후궁 | 에이카몬인 미즈코(즈이시) 여왕 (1272-1329) | 무네타카 친왕의 왕녀 | 없음 |
후궁 | 이치죠노 츠보네(一条局) 하시모토(후지와라)씨 | 하시모토 사네토시의 딸 | 제5황자: 세이쇼 법친왕 또는 요시하루 친왕 (?-1354) |
후궁 | 린시 여왕 (1265-?) | 무네타카 친왕의 왕녀, 미즈코 여왕의 이복동생 | 제2황녀: 소메이몬인/스메이몬인 바이코(바이시) 내친왕 |
후궁 | 이츠츠지(후지와라)씨 | 이쓰쓰지 무네시타의 딸 | 제3황녀: 타노시코(유시) 내친왕 |
후궁 | 가잔인(후지와라)씨 | 가잔인 나가마사의 딸 | 황자: 라쿠쇼쿠 |
후궁 | 신산이노 쓰보네(新三位局) | 불명 | 황자: 이름모름 (1307-?) |
4. 1. 부모
- 중궁 : 세이카몬인(西華門院) 호리카와(미나모토) 모토코(키시) (1269-1355) - 호리카와 토모모리의 딸이자 구키 모토소나의 양녀
- 제1황자 : 구니하루 친왕
- 텐시 : 단텐몬인(談天門院) 이쓰쓰지(후지와라) 다다코(츄시) (1268-1319) - 이쓰쓰지 타다쓰구의 딸이자 가잔인 모로쓰구의 양녀
- 제1황녀 : 다쓰치몬인(達智門院) 쇼시(마사코) 내친왕 (1286-1348)
- 제2황자 : 다카하루 친왕
- 제3황자 : 쇼엔 법친왕(性円 法親王) (1292-1347)
- 제4황자 : 쇼카쿠 법친왕(承覚 法親王) (1294-?)
- 비(妃) : 유기몬인(遊義門院) 레이시(레이코) 내친왕 (1270-1307) - 고후카쿠사 천황의 황녀
- 후궁 : 에이카몬인(永嘉門院) 미즈코(즈이시) 여왕 (1272-1329) - 무네타카 친왕의 왕녀
- 후궁 : 이치죠노 츠보네(一条局) 하시모토(후지와라)씨 - 하시모토 사네토시의 딸
- 제5황자 : 세이쇼 법친왕(性勝法親王) 또는 요시하루 친왕(良治 親王) (?-1354)
- 후궁 : 린시 여왕 (1265-?) - 무네타카 친왕의 왕녀이자 미즈코 여왕의 이복동생
- 제2황녀 : 소메이몬인/스메이몬인(崇明門院) 바이코(바이시) 내친왕
- 후궁 : 이쓰쓰지(후지와라)씨 - 이쓰쓰지 무네시타의 딸
- 제3황녀 : 타노시코(유시) 내친왕
- 후궁 : 가잔인(후지와라)씨 - 가잔인 나가마사의 딸
- 황자 : 라쿠쇼쿠(落飾)
- 후궁 : 신산이노 쓰보네(新三位局)
- 황자 : 이름모름, (1307-?)
4. 2. 배우자 및 자녀
배우자 | 이름 및 생몰년 | 출신 가문 및 비고 | 자녀 |
---|---|---|---|
중궁 | 세이카몬인 호리카와(미나모토) 모토코(키시) (1269-1355) | 호리카와 소나모리의 딸, 쿠가 모토소나의 양녀 | 제1황자: 구니하루 친왕 (고니조 천황) |
텐시 | 단텐몬인 이츠츠지(후지와라) 타다코(츄시) (1268-1319) | 이쓰쓰지 다다쓰구의 딸, 카잔인 모로츠구의 양녀 | |
비(妃) | 유기몬인 레이시(레이코) 내친왕 (1270-1307) | 고후카쿠사 천황의 황녀 | 없음 |
후궁 | 에이카몬인 미즈코(즈이시) 여왕 (1272-1329) | 무네타카 친왕의 왕녀 | 없음 |
후궁 | 이치죠노 츠보네(一条局) 하시모토(후지와라)씨 | 하시모토 사네토시의 딸 | 제5황자: 세이쇼 법친왕 또는 요시하루 친왕 (?-1354) |
후궁 | 린시 여왕 (1265-?) | 무네타카 친왕의 왕녀, 미즈코 여왕의 이복동생 | 제2황녀: 소메이몬인/스메이몬인 바이코(바이시) 내친왕 |
후궁 | 이츠츠지(후지와라)씨 | 이쓰쓰지 무네시타의 딸 | 제3황녀: 타노시코(유시) 내친왕 |
후궁 | 가잔인(후지와라)씨 | 가잔인 나가마사의 딸 | 황자: 라쿠쇼쿠 |
후궁 | 신산이노 쓰보네(新三位局) | 불명 | 황자: 이름모름 (1307-?) |
5. 연호
연호 | 기간 |
---|---|
분에이(文永) | 1264년–1275년 |
겐지(建治) | 1275년–1278년 |
코안(弘安)(가마쿠라 시대) | 1278년–1288년 |
참조
[1]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834
[2]
서적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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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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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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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1959
[8]
서적
[9]
문서
実躬卿記
1307-07-26
[10]
서적
上皇の日本史 (中公新書ラクレ) Kindle版
中央公論新社
2018-08-10
[11]
문서
奉号後宇多院、是遺詔歟
[12]
서적
上皇の日本史 (中公新書ラクレ) Kindle版
中央公論新社
2018-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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